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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사람]호찌민이 '목민심서'를 끼고 읽었다고?

아시아경제 티잼 김철현 기자최종수정 2017.05.19 10:50 기사입력 2017.05.19 10:50
1890년 5월19일 태어난 베트남 초대 대통령 호찌민과 정약용의 '목민심서'
호찌민과 '목민심서'
호찌민과 '목민심서'

베트남의 경제중심지인 호찌민, 한때 사이공이라고 불렸던 이 도시는 1976년 베트남 사람들에게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찌민의 이름을 따 도시명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19일이면 다양한 축하 행사가 열린다. 호찌민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호찌민을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월맹군 괴수 정도로 배웠던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의 호찌민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놀라곤 한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미국과 전쟁을 했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호찌민이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의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검소함과 청렴함, '호 아저씨'라고 불리는 친근한 이미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것은 호찌민이 평소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늘 가지고 다니며 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1890년 태어난 호찌민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818년 조선의 학자가 유배 중에 쓴 목민심서를 탐독했다는 얘기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한자에 조예가 깊었고 많은 한시를 남겼다는 점에서 다산의 목민심서를 구했다면 이를 읽고 가슴에 새겼을 수는 있다.

일설로는 그가 목민심서를 구한 경로가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1929년 코민테른이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운동가들을 위해 세운 학교였다. 호찌민은 여기서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등 한국인들과 함께 공부했다. 조국이 식민지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이들은 깊은 대화를 나눴고 이때 박헌영이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호찌민의 유품에 목민심서가 없다며 그가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는 것은 국내에서 잘못 전해진 얘기라고 주장한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목민심서의 가르침과 호찌민이 목민(牧民)으로서 가졌던 자세가 많은 부분 일치한다는 점을 눈여겨볼만 하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청렴한 관리를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최상은 '봉급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먹고 남는 것 역시 가지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것'이라고 했다.

호찌민이 진짜 목민심서를 곁에 두고 읽었는지 사실 여부를 떠나 그는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정약용이 말한 청렴의 최상 등급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찌민은 권력을 잡았을 때도 이를 통해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다. 평생을 혼자 살며 직접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신었고 지방을 다닐 때면 손수 돼지고기 볶음을 밥에 얹어 도시락을 쌌다고 한다. 또 프랑스 총독관저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관리인들이 묵는 오두막에 살았다. 가족들도 독립 전쟁에 참여했지만 대통령이 됐을 때 권력과 거리를 두게 해 친인척 비리를 철저히 차단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남긴 유산은 몇 벌의 옷과 지팡이,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등 밖에 없었다. 그는 유언으로도 거창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유해를 방부 처리해 영묘를 만들어 국민 화합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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