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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도시이야기]'필동'은 정말 붓을 만들던 동네였을까?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최종수정 2017.05.19 11:39 기사입력 2017.05.19 11:39
남산골 딸깍발이의 동네에서 해방 후 영화·인쇄의 메카로…또다른 변화를 기대중인 곳
충무로 명보사거리에 위치한 대종상 기념동상
충무로 명보사거리에 위치한 대종상 기념동상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서울 중구에 자리잡은 필동(筆洞)은 이름 때문에 예로부터 붓을 팔던 동네란 오해를 받곤 하는 곳이다. 수많은 인쇄업체들이 오밀조밀 모인 동네다보니 '대대로 붓을 팔던 동네'란 이미지가 딱히 어색하진 않다. 하지만 원래 필동이란 이름은 붓과 전혀 상관없이 만들어진 말이었다.
 
필동은 원래 부동(部洞)이란 말이 와전되면서 나온 이름이다. 조선시대 초기엔 지금으로 치면 구청 건물쯤 되는 한성부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있어 처음엔 부동(部洞)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부동을 '붓골'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후대에 관리들이 이 붓골을 다시 한자로 필동이라 표기하면서 동네 이름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부터 남산 일대를 통틀어 남촌(南村)이라고 흔히 불렀으며 특히 이순신 장군과 서애 류성룡 대감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알려진 현재 명보아트홀 주변은 건천동(乾川洞)이라 불렀다. 이 남촌 일대는 궁궐과 가까운 입지조건 때문에 수많은 대신들의 집이 있었으며 흔히 '딸깍발이'라 불리는 유생들도 많이 모여 살며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이 시대만큼은 정말 동네 이름대로 하루종일 붓글씨가 써내려지던 필동이었던 셈이다.
 
이런 사대부의 동네였던 필동이 일대 변혁을 맞게 된 것은 구한말부터다. 일본은 1876년 조선이 개항한 이후부터 남산 일대와 필동 주변을 조선 침략의 기반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남산 일대에 위치했던 일본군 주둔지인 왜장대(倭城臺)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됐고 필동 일대는 혼마찌(本町)란 이름의 일본인 집성촌으로 변했다. 일본은 남대문 주변 도성을 헐고 서울역을 지나 용산 일본군 주둔지로 이어지는 길을 조성했다. 이에 따라 필동을 비롯한 옛 남촌 일대는 빠른 속도로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도 가장 짙은 왜색이 드리워졌던 필동은 광복 이후 또 다른 변화의 물결을 맞는다. 오늘날의 충무로 인근을 중심으로 영화산업의 메카로 떠오른 것. 1960~1970년대 충무로 일대는 단성사, 피카디리, 대한극장, 서울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등 영화관들이 밀집하며 성황을 이뤘다. 오늘날에도 충무로란 지명 자체가 영화산업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자리잡게 된 이유도 이런 역사 때문이다.
 
이 영화산업의 번창과 함께 들어온 것이 현재 필동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인쇄소들이다. 충무로 영화산업이 발전하면서 필동에는 배우 지망생들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기 위한 사진관이 크게 늘어났고 영화 포스터와 홍보물 제작을 위한 인쇄소도 많아졌다. 1990년대 중반 상당수 영화사가 강남 일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과거의 영화(榮華)는 사라졌고 극장들도 대거 문을 닫았지만 오늘날에도 대한극장과 명보극장은 살아남아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다소 조용한 옛 도심이 된 동네지만 또 한 번의 변화를 준비 중이다. 2010년부터 서울시가 필동의 '역사도심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도심정비사업이 구체화되고 있다. 서울시는 필동에 남아있는 남산골 한옥마을, 한양도성, 남산에 위치한 근대 유적 등 그동안 필동에 누적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방향의 새로운 개발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시대적인 변혁의 물결에서 한동안 벗어나 있던 필동에 또다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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