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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왜 경주고와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의 교가를 지었을까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최종수정 2017.07.15 08:10 기사입력 2017.07.15 08:10
[깨알역사]경남 통영서 시작한 '교가 짓기' 운동..."노래 속에서 공동체 미래를 키우자" 유치환 조지훈 시인과 활동

▶ 빛은 동방에서, 서라벌에서…윤이상과 조지훈의 문화적 열정


꽃다운 혼 피어올라 서라벌 천년
수정 앞 남산에 옥돌이 난다
젊은 가슴 품은 뜻을 갈고 닦는 곳
이상에 불타는 그 이름 경주고등학교
퍼져나간다 빛은 동방에서 서라벌에서
아아 경주고등학교 영원한 마음의 고향아 마음의 고향아

굳세인 피 흘러내려 서라벌 천년
푸른 저 동산에 해 떠오른다
젊은 가슴 끓는 피가 파도치는 곳
사명에 불타는 그 이름 경주고등학교
퍼져나간다 빛은 동방에서 서라벌에서
아아 경주고등학교 영원한 마음의 고향아 마음의 고향아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조지훈 시인의 노랫말에 윤이상 선생이 곡을 붙인, 경주고등학교 교가다. 이 학교 출신인 나는, 가끔 동창회에 나가 팔을 흔들며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무슨 까닭인지 가슴이 꽉 메어와 울컥 눈물이 돋는다.

그 곡이 뜨겁고 아름다우며 그 뜻이 깊이 사무치는 바가 있어서도 그렇겠지만, 초중고 학교시절을 다채로운 곡절로 통과해온 많은 삶들의 기억을 일시에 소환하는 강력한 주술이 교가를 가창하는 행위에 숨어있기 때문인 점이 더 클 것이다.

이 교가가 아니더라도 대개의 교가는 돌아보는 이에게 눈물겹다. 기억이 돋우는 힘에 뭔가를 말하고 싶어 입술이 달싹거리는 그런 기분을 애써 지긋이 누른다.

유럽 유학 중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조작사건에 연루, 서울로 송환된 윤이상 선생은 사형을 언도 받지만 2년 뒤 특별사면을 통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서독으로 귀화해 죽는 그 날 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사진 왼쪽은 동백림 사건 송환 당시의 윤이상, 오른쪽은 말년의 모습.
유럽 유학 중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조작사건에 연루, 서울로 송환된 윤이상 선생은 사형을 언도 받지만 2년 뒤 특별사면을 통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서독으로 귀화해 죽는 그 날 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사진 왼쪽은 동백림 사건 송환 당시의 윤이상, 오른쪽은 말년의 모습.


▶ 통영문화협회와 학교 교가 지어주기 운동

윤이상 선생이 이 교가를 작성한 것은 1951년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 까닭은 뭘까.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윤이상은 유치환, 김춘수, 조지훈, 이상옥 시인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었다. 그 협회에서 벌인 사업 중의 하나가 전국 학교의 교가 지어주기였다.

청마 유치환 시인(1908-1967)
청마 유치환 시인(1908-1967)


시인과 작곡가는 왜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학교라는 곳은 이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학생들이 늘 부르며 마음에 각인시킬 수 있는 교가는, 어떤 노래 어떤 시보다도 강력하게 한 존재를 포맷하는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가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되새기며 공동체의 문화와 정서를 공유하는 공감대의 기반이 될수있다. 여기에 착안했을 것이다.

▶ 전국 18개 학교의 교가를 지어준 윤이상

통영에는 윤이상 작곡의 교가를 가진 초등학교가 8개나 있다. 광도(작사 김계원),두룡(이하 작사 유치환), 용남, 원평, 유영, 진남, 충렬, 통영초등학교다. 욕지중학교, 통영여중고, 통영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교가 또한 윤이상 작곡에 유치환 시인이 노랫말을 붙였다.

고려대학교(보성전문)와 경주고등학교(경주중학교와 함께)는 조지훈 노랫말에 윤이상 작곡이며, 마산고는 이상철 작사로 되어있고, 경주박물관학교는 윤경렬선생이 작사했다. 윤경렬은 '마지막 신라인'이라고 불린 향토사학자였다. 부산 양정고등학교의 응원가도 윤이상 작품(작사 강대만)이다. (현재 남아있는 교가, 응원가를 합치면 18개 곡이다.)

윤이상이 집중적으로 통영일대 학교의 교가를 만들었던 시기는, 1945년부터 1949년(부산사범학교로 이동했다)까지 통영에 머물렀던 때다. 이때 그는 통영공립고등여학교와 통영공립여자중학교의 음악교사였다. 그는 교가 속에 이 나라의 혼을 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노래는 아이들의 입에서 어른들의 정신으로 자라고 피어올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루는 '동백나무'가 되어있는지 모른다. 그와 시인들의 생각은 옳았다.

향토사학자 고청 윤경렬(1916-1999)
향토사학자 고청 윤경렬(1916-1999)


▶ 윤이상 육성 가창과 노래 설명이 들어있는 테이프

경주고등학교 교가를 짓던 1951년에 그는 부산에 있었을 것이다. 그의 교가 짓기 운동은 부산을 비롯해 전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1955년 그는 이 전해에 개교한 국립경주박물관 어린이학교의 교가를 지어준다. 친필 악보와 함께 녹음테이프를 보냈는데 그 속에는 '가창 때 유의할 점'을 설명하는 생생한 육성이 함께 들어있었다.

"경주 어린이들, 여러분은 경주에서 태어난 것을 얼마나 자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신라의 정신을 세상에 펴야 한다는 큰 꿈을 가지고 어린이 박물관 학교의 학생으로 늘 공부하십시오. 곡조는 슬기롭고 힘차게 부릅니다. 그러나 옛날의 신라 때를 아득히 우러러 생각하는 다정한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 뒤 윤이상은 교가를 직접 불러준다. "겨레의 고운 얼 길러준 뿌리 이어내린 이천년 거룩한 땅에 움트는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 아~ 우리 어린이 박물관 학교".

윤이상은 노래를 부르는 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붙여준다. '자라나는 곳'이란 대목에서는 점점 크게 무엇이 차츰차츰 자라나는 것과 같이 혹은 마음이 차츰차츰 감격해서 부르고, 그 다음에 '아~'는 힘차게 부르고, 그 다음에 '우리 어린이'는 천진난만하게, 그 다음에 '박물관학교'는 한 말 한 말을 똑똑하게 힘을 주어 불러야 한다고 주문한다.

경주고 교정에 서있는 '큰 나의 밝힘' 비문석.
경주고 교정에 서있는 '큰 나의 밝힘' 비문석.


▶ 통영 시절 함께 활동한 유치환 시인이 경주고 교장으로

통영 시절에 같이 활동했던 청마 유치환이 경주고등학교 교장(제8대)으로 취임하는 것은 1955년 1월31일이었다. 그는 1959년 9월까지 이 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큰 나의 밝힘'을 학교훈으로 삼아 교정에 비문을 세웠다.

"나는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나란 나만으로서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나란 나만에 속한 내가 아니다"라는 '큰 나'의 의미를 부연설명해놓은 이 비문은, 강렬한 울림을 10대의 심장에 던져놓던 기억이 난다. 윤이상이 어린이박물관학교 교가를 지을 무렵,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든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시 평생을 경주 역사 연구에 바쳤던 윤경렬 선생이 부산에 있던 윤이상에게 교가 작곡을 청하는 열렬한 호소를 보낸 건 아닐까.

조지훈 시인(1920-1968)
조지훈 시인(1920-1968)


▶ '수정 앞남산'이란 말은 무슨 뜻

경주고 교가를 부르던 어린 시절엔, 미처 질문을 삼을 겨를도 없는 당위로 받아들였던 구절 하나가 뒤늦게 의문문으로 불쑥 돋는다. '수정 앞남산에 옥돌이 난다'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남산돌이면 모두 옥돌이냐는 속담이 나올 정도로 옥석이 많았던 경주 남산을 얘기한 것이며, 숨은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리라는 격려를 담은 취지는 알겠다. 그런데 수정이란 말을 왜 굳이 앞남산 앞에 붙였을까. 뒤에 옥돌과 같은 뜻의 말이라면 굳이 군더더기 같은데 말이다. 돌아간 작사자 조지훈 시인(1920-1968)에게 여쭤볼 수도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앞남산은 남산을 늘 눈앞에 두고 살았던, 나와 같은 경주 출신에겐 익숙한 말이다. 그 말 앞에 붙은 수정에 대한 비밀을 캐보자. 1962년 3월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시인 박목월의 칼럼 '내 고향의 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땅, 그 길, 그 터에 자욱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황홀한 갈증. 목이 마르게 된다. 아무렇게 길 가에 있는 주막을 찾아가서 '과미(메)기'라는 마른 생선에 뿌연 막걸리를 서너잔 들고 거나한 기분으로 눈을 들어보라. 퍼렇게 봄빛으로 풀려가는 수정남산(水晶南山)의 젖은 모습이 눈물처럼 눈에 거득히 고여올 것이다."

경주 출신의 이 시인이 서라벌 봄날의 아지랑이 풍경을 풀어놓은 이 언어 속에 '수정남산'이란 네 글자가 나온다. 1962년에는 적어도 경주남산을 수정남산이라고도 불렀다는 얘기다. 윤이상은 수정남산을 수정 앞남산이라고 더욱 친근하게 부른 셈이다.

▶ 김동리 "투명한 수정으로 엉긴 것 같은 산"

또다른 경주 출신인 소설가 김동리는 1977년 10월27일 경향신문에 '경주, 신라의 모토(母土)'라는 기획 시리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주 남산에 나무를 심자는 박정희 정부의 녹화정책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 인상적인 글이다.

"경주 금오산(남산)의 녹화는 생각할 문제다. 이것은 나의 향수와 꿈을 산산조각 내놓았대서만이 아니고, 경주가 가지는 전체적인 조화, 자연적인 풍취를 여지 없이 깨뜨려놓기 때문이다. 이 산은 거의 전부가 암석으로 되어 있어, 그 전체가 투명한 수정으로 엉긴 것 같은 맑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면도하지 않은 털보 얼굴같이 검검추레하고 우중충할 뿐, 전날의 그 맑고 신비한 빛은 찾아볼 길 없다."

여기에, 경주 남산이 원래 그 전체가 투명한 수정으로 엉긴 것 같은 맑은 기운을 지닌 산이었다는 증언이 들어있다. 수정남산이나 수정 앞남산이란 호칭을 후련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수정남산에서 태어난 이들이여, 옥돌이 되라

조선시대의 안경은 주로 경주 남산에서 생산되는 수정인 경주 남석(南石)으로 안경알을 만들었다. 남석은 신라시대의 곡옥이나 구슬을 만드는 원료이기도 했다. 이름조차 수정남산이니 그곳에서 태어난 인재들이 옥돌이 되는 건(물론, 사고 치고 삐딱선 타는 일만 하지 않으면 말이다 ) 당연한 일이라고 조지훈과 윤이상은 힘주어 이곳 청년들에게 엄지척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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