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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525년전 콜럼버스 첫 항해…위대한 발견의 속내 들여다보니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최종수정 2017.08.03 10:28 기사입력 2017.08.03 10:25
스페인에선 희대의 사기꾼,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학살자로 악명높은 탐험가
서인도제도에 당도한 콜럼버스(사진=위키피디아)
서인도제도에 당도한 콜럼버스(사진=위키피디아)

1492년 8월3일은 신대륙 발견자로 전 세계 역사서에 수록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첫 항해를 떠난 날이다. 이날 스페인을 떠난 그의 함대는 약 2개월 뒤인 10월12일 현재 바하마(Bahamas)제도에 당도했고, 그곳을 인도라 믿었던 그의 열망대로 여전히 카리브해의 군도들은 '서인도제도'란 이름이 붙어있다.

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자'로서의 위명은 사실 서구세계가 붙여준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과 같은 고도의 문명체제도 존재했다. 구대륙과 신대륙이란 용어도 편견에 가득찬 용어였으며 최근에는 그를 위인이라기보다는 서구의 공격적인 제국주의의 선구자로 보려는 경향도 많다.

콜럼버스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콜럼버스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지난 2000년에는 전 세계 고고학,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자들이 지난 밀레니엄시대 인류 최대의 실수로 꼽았던 사건이 바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기도 했다. 콜럼버스의 항해로 인해 유럽의 자본과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주민들, 아메리카의 영토를 합친 삼각무역과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토착문화와 사회체제의 파괴, 인종 대량학살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이런 악명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궁금증은 그가 정말로 죽을 때까지 서인도제도를 진짜 인도로 믿었는가의 여부다. 사실 콜럼버스가 활약했던 시대는 대항해시대가 열린지 수십년이 지난 후로 포르투칼을 선두로 유럽 각국의 조선술과 해상 운송능력이 크게 발전하던 시기다. 유럽 서쪽을 통해 아시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콜럼버스의 사업아이템은 그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콜럼버스의 항해로(사진=위키피디아)
콜럼버스의 항해로(사진=위키피디아)

콜럼버스는 원래 스페인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 왕궁을 돌아다니며 후원을 요청했지만 유럽 각국의 왕들은 일단 그를 사기꾼으로 취급하고 그의 사업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기원전 4세기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증명했을 정도로 대다수 학자들과 왕들이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으며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 항해가 본격화되던 시기에 대서양을 건너 일본, 인도까지 갈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실제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일부러 수천킬로미터 축소해 발표하곤 했다. 그러니 이미 항해술이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그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콜럼버스는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보물의 10%, 그 지역의 총독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등 엄청 까다로운 계약조건까지 달고 나왔다. 보통 보물이 5%에 기록 저작권 요청 정도에 지나는 일반 계약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한 것. 이에 스페인 국내에서도 대신들과 학자들은 그를 내쫓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도운 이사벨라 1세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콜럼버스의 항해를 도운 이사벨라 1세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스페인에는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 공동왕위를 보유하고 있던 이사벨라 1세의 존재였다. 그녀가 확실히 왜 콜럼버스에게 투자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싸여있지만 이사벨라 1세는 누가봐도 사기꾼인 이 탐험가에게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다. 여왕은 자신이 보유했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면서까지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했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도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1세의 정부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어쨌든 여왕의 강력한 후원아래 4차례의 탐험이 이이졌다. 서인도제도 발견 후에 그는 각 섬을 탐험하며 원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았다. 그가 가기 전에 30만명에 이르렀던 아이티섬의 인구는 2년만에 10만명이 사망하고 그가 마지막 원정을 갔을 때는 500명밖에 남지 않았을 지경이다. 그는 투자자인 여왕과 스페인 본국을 만족시킬만한 금광을 찾아 헤맸지만 이 섬에 그런 금광이 나올 리가 없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500주년 기념으로 만든 영화 '1492 콜럼버스' 모습(사진= 영화 '1492 콜럼버스' 장면 캡쳐)
콜럼버스의 항해 500주년 기념으로 만든 영화 '1492 콜럼버스' 모습(사진= 영화 '1492 콜럼버스' 장면 캡쳐)

결국 그의 지나치게 잔인무도한 행태에 부하들까지 원주민들과 연합해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고 콜럼버스는 도망치다가 스페인 군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도 많았다. 스페인 본국에도 그의 악명이 돌기 시작하자 안 그래도 그를 사기꾼으로 여기던 스페인 대신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고 이후 1504년, 콜럼버스를 유일하게 보호하던 이사벨라 1세까지 병사하면서 콜럼버스의 몰락이 시작된다.

엄청난 비난 속에 후원자까지 잃고 빚더미에 앉은 그는 1506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매독으로 숨졌으며 마지막 유언은 스페인에 절대 묻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그가 스페인의 황금기를 개척한 인물로 추앙받게 되자 1542년, 콜럼버스의 유해는 그의 소망대로 산토도밍고로 이장됐고 1795년에는 아바나로 옮겨졌다. 그러나 스페인이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쿠바가 독립하자 다시 그의 유해는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스페인 세비야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의 관(사진=위키피디아)
스페인 세비야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의 관(사진=위키피디아)

그나마 죽어도 스페인에 묻히기 싫다던 그의 유언을 조금이라도 들어주고자 그의 관은 지상에서 붕 떠있게 설계됐다. 죽어서도 대서양만 몇차례 왔다 갔다 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죽음에 대해 그나마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내린 작은 벌에 지나지 않는다는 악평이 쏟아질 뿐이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명성으로 남은 것은 미국에서 매해 10월12일, 그가 바하마제도에 당도한 날을 기념하는 콜럼버스 데이 뿐이다. 그나마도 아메리카 지역 원주민들은 역사 속의 악당을 기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고 미국 내에서도 하와이, 알래스카, 사우스 다코다, 오레건 등 주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원주민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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