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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72년 전 오늘, 원폭에 희생된 비운의 왕자 '이우' 사망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최종수정 2017.08.07 14:39 기사입력 2017.08.07 14:39
이우 왕자가 일본군에 복무당시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우 왕자가 일본군에 복무당시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945년 8월7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후예 중 한사람이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군에 복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당했던 왕자 이우가 사망한 날이다. 이우는 평생을 일제에 볼모로 잡혀 살다가 끝내 원폭을 맞고 사망한 비극적인 삶으로 유명한 조선의 마지막 황족 중 한사람이다.

이우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의친왕 이강은 조선 왕족 중 최후의 의기를 보여준 인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국내 탈출을 시도, 임시정부로 향하다가 일제 순경에 붙잡혀 돌아오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답게 어려서부터 상당히 호방한 기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우가 5세 때,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기 위해 이우는 친족회의에서 고종의 뜻에 따라 죽은 이준용의 양자로 결정됐다. 이에따라 이우는 이준용의 작위였던 공(公)작위를 세습받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1922년, 일본에 강제 유학되던 시절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922년, 일본에 강제 유학되던 시절 모습(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이런 연유로 왕족 중에서도 특수한 취급을 받게 돼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다. 1922년부터 일본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졌다. 이후 1926년 구 조선왕족들은 만 18세에 도달하면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해야한다는 의무가 강제되면서 그해 4월부터 일본육군유년학교에 강제 입교돼 1929년까지 다녔으며 이허 1929년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강제 입교됐다.

이후 193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하자 곧바로 포병 소위로 임관했고 도쿄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하면서 1941년에는 일본육군대학교까지 졸업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각 전선을 시찰하며 병사들을 위무하는 일이 강제됐다. 1944년 중국 산시성에 배정받았을 때는 당시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교전하던 조선의용군을 몰래 지원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거의 전 생애를 일본의 볼모로만 살아간 삶이었지만 일본 측에서도 그의 친부인 이강과 함께 매우 다루기 어려운 조선 왕족으로 유명했다. 일본 궁내성의 끈질긴 방해에도 일본인 여자와는 절대 결혼 못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끝내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의 딸인 박찬주와 1935년 결혼했다. 원래 일제는 일본인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해 일본의 화족 중 한명인 야나기사와 야스츠구 백작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나온 이우 사망 소식(사진=위키피디아)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나온 이우 사망 소식(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전화에 휩쓸리고 만다. 1945년 6월, 일제는 그를 중좌(오늘날 중령계급)로 진급시킨 후 본토 결전을 위해 히로시마로 부임할 것을 명한다. 당시 히로시마는 일본의 대표적인 군사도시로 청일전쟁 당시엔 일왕 휘하에 군사최고기관인 대본영이 위치했던 도시이자 일본 군벌의 상징인 조슈번의 번주 모리가문의 발흥지였다. 이로 인해 원폭 투하 대상지 1위 중 하나였다.

이우는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해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 배속을 청하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이우는 운현궁에 한달간 칩거하면서 측근들에게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 독립은 시간문제이나 미국 뿐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해방 후 뒷수습이 더 큰 문제"라며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전한다.

또한 이우는 전출을 최대한 피하고자 일본으로 가면 모두 죽는다며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간다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나 버티는데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7월16일, 부임지 히로시마로 향했다. 부임 이후에는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근했다고 전해지며 피폭 당일에도 출근길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출근 도중 사망했다.

히로시마 원폭 직후 발생한 구름 모습(사진=위키피디아)
히로시마 원폭 직후 발생한 구름 모습(사진=위키피디아)

8월6일 당일, 이우는 말을 타고 출근하다고 고집을 피워 말을 몰고 참모본부로 가던 도중, 히로시마시 중앙부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됐다. 이곳은 최초 폭심지역에서 불과 7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치명상은 불가피했다. 피폭 당일 오후가 돼서야 흙투성이로 발견된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이미 화상이 너무 심각한 상황이었고 다음날 새벽에 결국 숨을 거뒀다.

죽은 후에도 이우는 야스쿠니 신사에 가족 동의없이 강제로 합사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사망시점 일본인이어서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신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발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1970년, '한국인 원폭 의생자 위령비'를 건립하며 그가 피폭 후 발견된 히로시마 아이오이교 부근에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 전면에는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적혔다. 이후 히로시마시는 위령비의 평화기념공원 내 이전을 계속 거부하다가 결국 1999년에서야 이전을 허가했다.

이우가 사망한 히로시마 아이오이교 부근에 세워졌던 '한국인 원폭 의생자 위령비'. 199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로 이전됐다.(사진=위키피디아)
이우가 사망한 히로시마 아이오이교 부근에 세워졌던 '한국인 원폭 의생자 위령비'. 199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로 이전됐다.(사진=위키피디아)

끝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희생되고 말았지만 생전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일본인들은 그를 매우 의기로운 왕족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재직시 동기생이었던 일본 황족인 아사카 다케히코는 "이우는 항상 조선은 독립해야한다는 마음을 새기고 있어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 앞서려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운현궁에서 가정교사를 지냈던 가네코란 일본인도 "이우는 조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이러한 평가들을 감안해 그를 친일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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